수능 공부는 많이 맞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시리즈 2편)
이 글은 반 25등이 10개월만에 인서울 대학가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수능 공부는 체치기
"수능 공부는 체치기야."
'체치기? 무슨 말이지?'
수능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고2 겨울방학.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된 학원의 원장님 말이 꽤나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원장님은 몸을 내쪽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공부는 얼마나 많이 맞추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얼마나 찾느냐의 싸움이야."
원장님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거든요. 많이 맞추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체를 친다는 것은 과목의 전체 범위 안에서 틀리는 문제, 모르는 문제를 걸러내는 과정이야. 물론 처음엔 무척 힘들어. 수학을 예를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바퀴 도는데 두 달 이상이 걸릴거야. 하지만 그 다음엔 1달, 그 다음엔 몇주 그리고 며칠로 줄어든다. 나중엔 왠만한 문제집도 하루면 다 풀수 있게 돼."
고3이 될때까지 수학 진도를 끝까지 빼본적이 없는 내가 그게 가능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수학도 그러한데 전 과목을 몇바퀴씩 돌린다고?
"처음엔 체에 걸러지는 모르는 문제들이 정말로 많을거야. 버티기 힘들정도로. 하지만 진짜 힘들어지는 것은 체를 치면 칠수록 모르는 문제를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거지. 사실 여기가 포인트야. 얼마나 정교하게, 많이 체를 쳐서 깊숙히 숨어 있는 모르는 문제를 찾느냐가 대입에 성공하느냐 마냐를 가르는 것이지."
원장님의 이야기는 제 마음을 확 끌었습니다. 제가 가진 공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부수는 말이었거든요.
모르는 것을 찾는 즐거움
시험문제를 틀리는 것은 정말 속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채점할때 동그라미 대신 엑스자를 그어야 할때 주저하곤 했죠. 동그라미로 가득 차야 완벽한것 같은데 커다란 흠집이 생기는 느낌이었거든요. 시험지 위 뿐만 아니라 제 가슴에도요.
하지만 애덤 그랜트의 '모르는 것을 아는 힘'에서는 만약 계속 틀리는 과정이 정답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틀리는 경험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의 한 마디를 소개합니다.
"틀리는 것만이 내가 무언가를 배웠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지."
틀린 문제가 부끄러운 결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목표라는 말. 찍지 말고 정직하게 모르는 것을 시인하고 찾아내는 것이 지향점이라는 원장님의 말이 제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맞추는 것은 몰라도 틀리는 것은 자신있었거든요. 사실 틀리는 과정 안에 공부의 왕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저는 학원을 다니기로, 원장님이 시키는대로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체치기는 끊임없는 테스트의 연속
위 그림은 지혜를 얻는 6단계를 보여줍니다. 1. 살면서, 2. 실수하고, 3. 그 실수에서 배우고, 4. 앞의 과정을 반복해서 지혜를 얻고, 5. 얻은 지혜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얻고, 6. 1단계부터 5단계까지를 평생 반복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체를 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진행했습니다.
- 수업을 통해 진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간다.
- 문제집을 푼다.
- 틀린다.
- 틀린 것을 모아 오답노트에 기록한다.
- 오답을 다시 푼다.
- 1번으로 돌아간다.
위 과정을 자세히 보면 '배우고 - 테스트한다'라는 개념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업을 듣고 내용을 이해하고 외우는 과정보다 문제를 푸는 테스트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시간 투자를 했습니다.
'아웃풋 대전'을 쓴 정신과 전문의인 카바사와 시온은 자기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공부는 아웃풋(테스트)에서 나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단순히 읽고, 들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인풋이며 이것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지만 말하고 쓰는 테스트를 하는 것은 아웃풋이며 여기서 자기 성장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풋과 아웃풋의 황금 비율은 3:7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체치기 과정은 결국 아웃풋에 중점을 둔 자기 성장의 프로세스였던 것입니다.
처음 체를 칠 때는 모르는 내용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반복을 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을 찾고, 그것을 메꾸다보니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체를 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습니다. 체에 걸리는 문제들은 점점 줄어갔고요. 그와 반비례해서 성적은 쭉쭉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틀리는 것을 모으는 과정이 심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았고, 점수가 올라가니 스스로 만족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의무교육 11년간 못느꼈던 공부의 즐거움을 마지막 1년이 남아서야 느끼게 되었죠. 매일매일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새벽부터 새벽까지 공부한 고3때를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기억합니다.
수능 공부에서 체치기가 특히 효과적인 이유
내 키의 3배. 수능이 끝났을 때 제가 푼 문제집의 합계입니다. 프린트물로 푼 문제집은 제외한 양이니 꽤 많이 풀었지요? 제 최종 점수는 400점 만점에 384점이었습니다. 10개월 전에 300점대 초반이었으니 대성공한거지요. 고3 내내 수직상승하는 제 점수는 선생님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수능 공부에서 체치기가 특히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수능은 과목별 만점이 쉬운 시험이라 작은 실수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찾는 체치기가 효과적이죠.
두 번째로 수능은 체를 칠 수 있는 도구가 풍부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연구가 많이 되는 시험이라 좋은 문제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잖아요. 문제집이 많으니 얼마든지 체를 쳐서 실수를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수능 공부는 체를 쳐야 하는 이유와 환경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죠.
아쉽지만 명확했던 한계점
시험 결과를 받아 보니 제가 가졌던 한계도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첫날 원장님이 덧붙이셨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체치기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어. 하지만 너는 단 10개월만에 진도도 나가야하고 체도 쳐야하지."
10개월만에 인서울 불가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올라왔으니 대성공이었지만 제가 목표를 했던 SKY에는 못갔습니다. 원인은 체를 더 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죠. 깨끗하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 한계였습니다. 그래도 어때요. 제 인생의 방향성이 달라졌는데요. 점수도 잘 받았고, 공부하는 법을 깨달았고, 마흔이 넘어서도 버텨주는 자존감을 얻었는걸요.
이번 편을 통해 어떤 방법으로 공부했었나를 알아보았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어떤 마음가짐, 정신적 서포트가 저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